그녀와 연애 씩이나 하게 된 건 일종의 위악이었다. 씨발 나 다시는 페미니스트 안 사겨. 고학력자 지긋지긋해, 여자를 고르는 기준은 역시 팔씨름이지, 이죽이던 말들. 얼마 후 그 ‘이상형’에 놀랄만큼 부합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일단 키가 백팔십에, 어릴 때 부터 농구를 했고, 체대를 갔고, 대학 졸업을 못해서 고졸이고,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퀴어문화축제같은 거 안했으면 좋겠고 이쪽 인맥도 싫고 조용히 둘이서 지내는게 좋다던 사람, 내 치마가 너무 짧다고 항상 불만이던 사람, 누드모델이란 직업은 인정하지만 ‘내 여자’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뭐가 문젠지도 모르던 사람.
번개로 처음 만난 날 당연한 듯 모텔로 향하려는 내게 그녀는 ‘난 사귀는 사람이랑만 자’ ‘그러니까 우리 사귀자’ 라며 무슨 로비스트 같은(내 은밀하고 유치한 취향을 파악한 누군가가 파견한 듯한) 말들을 던졌다. 만나는 내내 나는 그녀의 말도 안되는데서 삑사리가 나는 맞춤법, 뜻밖의 상식부족 등을 친구들과 낄낄대며 그녀를 깎아내렸다. 무엇보다, 영원히 함께하자, 너랑 결혼할거야, 같은 말들을 ‘겁도 없이’ 내뱉는 그녀를 비웃었다. (역시) 무식하기는. 요새 누가 평생 한 사람을 만나, 라면서.
그녀의 생일날, 선물이랍시고 육보시를 하겠다며 란제리를 입은 나에게 애인은 규리야 사랑한다, 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당황스러웠다. 사랑이 뭘까? 라며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후 오래, 나는 그저 그녀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나도 사랑해.
그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했단 걸 이제야 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언제나, 믿기를 염원하던 말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게 너였기 때문에. 왜냐하면 너는 누구를 무시하지도 비웃지도 이죽대지도 낄낄거리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영원이니 평생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보곤 했으니까. 너는 그토록 진실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자격이 없고, 그러니 네가 떠나는 건 가장 너다운 일이란걸, 이제서야.
이 관계에는 레퍼런스가 너무 많아서 헛웃음이 나온다며 지금도 나는 건방을 떤다. 근데 그저 네가 너무 보고싶다.. 모든 게 후회스럽고, 가슴이 저민다는 말이 뭔지 알겠다. 돌아오지도, 돌아보지도 않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너를 사랑한다고, 이제는 말할 수가 없기에 여기에 쓴다. 조금은 너를 닮고 싶어서.
(2018년 4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