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문화센터 손바닥합평-배추벌레 살육기

노래방 일에서 가장 힘든 건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에 뿌옇게 퍼지는 담배연기였다. 허리를 안은 남자들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봉고차 옆자리 여자들과의 신경전도, 시급 6만원이라는 숫자 앞에서는 다 참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돈벌이와 마음을 분리하는 것은 월급쟁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코가 막히는 매캐한 담배 냄새만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일할 때만 입는 몇 벌의 옷에는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배어 갔고, 집에 돌아 온 새벽이면 행여 다른 옷에 냄새가 묻을까 황급히 옷을 벗어 문 밖 빨래줄에 널어 두곤 했다.

가난 때문은 아니었다. 명품을 사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배추벌레 때문이었다. 배추와 케일을 갉아먹는 벌레를 핀셋으로 잡다보면 출근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상추겉절이를 반찬으로 싼 도시락을 여유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마감에 가까울수록 잦아지는 야근과 그때마다 시켜먹는 순두부찌개가 지긋지긋했다. 학생 때 꿈꾸던 자전거 출퇴근과 주말 라이딩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을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척 하며, 모종삽으로 통통한 배추벌레를 반으로 잘라내곤 했다. 삽으로 그은 자리를 따라 초록빛 진액이 심술궂게 새겨졌다. 그런 내가, 낯설었다.

그해 봄, 건축회사를 그만 두고도 한동안은 실업급여로 버텼다. 그 흔한 동남아 한 번 가지 않고 20대의 6년을 바친 대가로 7천짜리 전세에 살고 있는 것도 조바심을 내지 않던 이유 중 하나였다. 작은 원룸이지만 옥탑을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이 방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맘에 든, 내 공간이었다. 한낮에 파라솔을 펴놓고 돗자리에 누워 있자면, 콘크리트의 냉기가 내 안의 분심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다. 스티로폼 텃밭이 늘어갔다. 장을 보지 않아도 밥상엔 쌈야채가 풍성했다. 그러다 통장 잔고가 99만원이 되던 날, 알바몬에 들어갔다. 다시 회사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한 달에 칠팔십만원 만 벌면 되겠다는 계산이었다.

가까운 역 몇 개를 클릭한 후 시급순으로 정렬하니 가장 위에는 편의점이 있었고, 맨 뒷페이지에는 토킹바가 있었다. 그 사이에는 택배상하차와 백화점 판매직, 그리고 텔레마케팅이 있었다. 주말 토킹바를 제외하면 매일 출근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월급이나 주급이 아니라 일급을 주는 일을 찾으니 나온 것이 노래방 도우미였다. 어차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였다. 전화번호를 감출수 있는 메신저 앱을 설치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도방 삼촌도 노래방 사장도 그저 무심했다. 대학생들은 워낙 금방 그만둬서, 라며 삼촌은 나이가 좀 있는 나를 오히려 반가워 했다. 노래방이 대개 지하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축농증으로 고생했던 초등학생 때 처럼, 집에 오면 소금물을 진하게 타 코를 헹궜다. 그래도 목이 잠기는 날이 많았다.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기서 거기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 재빨리 리모컨을 들어 음정을 한 키 낮추면 되었다.

일을 나가지 않는 날엔 자전거를 타고 잠실과 암사를 오갔다. 공기가 맑은 날은 충동적으로 팔당에 다녀 오기도 했다.

장마철이 되었다. 주인할머니가 배수구를 점검한다고 올라왔다가 빨래 줄에서 거두지 못한 홀복을 본 모양이었다. 왜 낮에 집에 있냐고 묻는 눈빛이 사마귀같았다. 지금은 같은 빌라에 살지 않지만, 딸네 집으로 합치기 전까지 이 동네에 오래 살아 귀가 많은 할머니다. 대학원에 입학했다고 둘러댔다. 한학기 만에 그만뒀지만, 취직하기 전에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 매일 도시락을 싸고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던 좋았던 시절, 그러나 학자금 빚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었던.

비가 지나가니 서른이었다. 배추벌레가 케일 위를 오간 흔적이 내 이력서처럼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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