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단역 알바를 했다.

영화 단역 알바를 했다. 역할의 이름은 ‘창녀’. 전에도 에이전시를 통해 샤워씬 섭외가 들어왔는데 문신과 왁싱 때문에 짤렸던 영화다. 회사에선 옷을 벗는 뒷모습 정도만 나오고 얼굴이 안 나온다고 했다. 얼마 주는지는 묻지도 않고 한다고 했다.

11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혜화 낙산공원에 접한 낡은 빌라였다. 핸드폰 지도앱을 보며 빙빙 돌고 있을 때, 영화 스탭인것 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혹시 영화 촬영..’이라고 물었더니 맞다면서 데려다 줬다. 11시쯤 도착. 허름한 자취방. 여자 배우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배우분께 대본을 청해 내가 나오는 장면을 읽어봤다. 주인공 남자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일부러 성매매여성을 데려와 여자친구 옆에서 섹스를 하는 (풉) 씬이다.

전체 시나리오를 훑어보았다. 음, 성매매여성을 ‘창녀’라고 하는 워딩,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그 옆에서 ‘창녀’를 불러 섹스를 한다는 설정 등 여성에 대한 감독(이자 작가이자 주연배우)의 고정관념과 문제의식은.. 말을 아끼도록 하겠음. 여튼 내가 첫 ‘연기’를 성매매여성으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웃기고 재미가 있었다. 풉. BDSM주제의 논문, 젖은잡지, 슬럿워크, 누드모델에서 급기야는 성매매여성(역할)까지.. 어쩜 이렇게 일관성이 있냐.

원래 대사도 얼굴도 나오지 않고 그냥 옷 벗는 모습만 나온다고 듣고 가긴 했는데, 실제로 촬영을 한 것은 섹스씬이었다. 우리 회사 대표님도 대동했는데 (원래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는 일에는 남자인 대표님이 동반한다고 들었다. 여자 모델에게 처음 얘기한 것과는 다른 요구를 하는 경우도 많고 여러 위험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내가 처음 들었던 것과는 다르지 않냐고 물었더니 감독이 스탭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음, 나는 뭐 얼굴이 나오거나 섹스씬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연기 경험이 없어서 잘 못할까봐 그게 걱정인거라고 했다. 감독은, 보통 여자 모델들은 얼굴이 나오는 걸 꺼리는데, 얼굴 나오는 게 괜찮다고 하니 모델이 아니라 배우처럼 대사도 넣고 씬도 더 길게 가고 좀 더 역할을 주는 거라고 선심쓰듯 말했다. 뭐.. 좋다. 언젠가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왔다는 정도. 물론 그 역할이 ‘창녀’일 줄은 몰랐지ㅋㅋㅋㅋ 대표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말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여튼 감독은 연기력을 걱정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연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역할이 남자는 깡패고 여자는 창녀에요. 쉽거든”

그래서, 그렇게 진행을 했다. 모델료는 그대로 가고. (애초에 나는 이 일로 얼마를 받는지 모르고 갔다. 이건 내 실수.) 대신 나중에 영화 정보 페이지에 프로필도 올라간다고 했다. 내 대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옷을 급하게 벗기는 주인공에게 콧소리를 내며 “오빠 왜 이렇게 급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가 나를 문짝에 밀치고 겉옷과 팬티를 벗기면 나는 브라를 벗고, 섹스신, 과장된 신음소리, 즉 ‘창녀 연기’. 근데 자꾸 다시 찍는거야.. 결국 내가 연기지도(!)를 하고 말았다. “허리를 더 밀착하셔야 되요. 박는게 아니라 붙어서 비비는 느낌으로.” 뭐 실제 삽입은 안 했는데, 가짜로 하는 게 더 힘든 듯..

나중엔 나한테 사과하더라, 자기가 배우출신이긴 하지만 섹스 씬을 찍은건 처음이라 연기를 못 해서 죄송하다고. 나는 그럼 뭐 프로냐ㅋㅋㅋㅋㅋㅋㅋㅋ 감독이 자꾸 ‘제가 처음이라..’라고 하는데 레즈비언 커밍아웃 욕망 넣어두느라 혼났다. ‘저도 남자랑 이런 건 처음이에요.’

음, 지금 생각 해 보니 감독이 게이인가? 아냐 게이라면 그렇게 남성성/여성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나올 수가 없어.

여튼 풀샷 다섯번 쯤 찍고, 클로즈업을 세 번 정도. 결국 두 시에 끝났다. 대기시간 포함 세 시간을 잡혀 있었던 건데,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시간 당 페이를 받는 모델일로는 매우 적게 받고 한 셈이 되었다. 그래도 내 부분 촬영 마치고 전원에게 박수 받았다. 감독은 오늘 연기 좋았다며, 다음 작품에서 주연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뭐, 즐거웠다. 내 장래희망인 ‘레즈비언 포르노 배우’의 첫 발을 디딘 하루였음.

(2015년 초. 날짜 기억 안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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