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2017에서 봄, 2018까지

그녀와 연애 씩이나 하게 된 건 일종의 위악이었다. 씨발 나 다시는 페미 안 사겨. 고학력자 지긋지긋해, 부치를 고르는 기준은 역시 팔씨름이지, 이죽이던 말들. 얼마 후 그 ‘이상형’에 놀랄만큼 부합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일단 키가 백팔십에, 어릴 때 부터 농구를 했고, 체대를 갔고, 대학 졸업을 못해서 고졸이고,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퀴어문화축제같은 거 안했으면 좋겠고 이쪽 인맥도 싫고 조용히 둘이서 지내는게 좋다던 사람, 내 치마가 너무 짧다고 항상 불만이던 사람, 누드모델이란 직업은 인정하지만 ‘내 여자’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뭐가 문젠지도 모르던 사람.

로다 번개로 처음 만난 날 당연한 듯 모텔로 향하려는 내게 그녀는 ‘난 사귀는 사람이랑만 자’ ‘그러니까 우리 사귀자’ 라며 무슨 로비스트 같은(내 은밀한 취향을 파악한 누군가가 파견한 듯한) 말들을 던졌다. 만나는 내내 나는 그녀의 말도 안되는데서 삑사리가 나는 맞춤법, 상상이상의 상식이하 등을 친구들과 낄낄대며 그녀를 깎아내렸다. 무엇보다, 영원히 함께하자, 너랑 결혼할거야, 같은 말들을 ‘겁도 없이’ 내뱉는 그녀를 비웃었다. (역시) 무식하기는. 요새 누가 평생 한 사람을 만나, 라면서.

그녀의 생일날, 선물이랍시고 육보시를 하겠다며 란제리를 입은 나에게 애인은 규리야 사랑한다, 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당황스러웠다. 사랑이 뭘까? 라며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후 오래 동안 나는 그저 그녀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나도 사랑해.

그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했단 걸 이제야 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언제나, 믿기를 염원하던 말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게 너였기 때문에, 왜냐하면 너는 누구를 무시하지도 비웃지도 이죽대지도 낄낄거리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영원이니 평생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보곤 했으니까. 너는 그토록 솔직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자격이 없고, 그러니 네가 떠나는 건 가장 너다운 일이란걸, 이제서야.

이 관계에는 레퍼런스가 너무 많아서 헛웃음이 나온다며 지금도 나는 건방을 떤다.. 근데 그저 네가 너무 보고싶다. 모든 게 후회스럽고, 가슴이 저민다는 말이 뭔지 알겠다. 돌아오지도, 돌아보지도 않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너를 사랑한다고, 이제는 말할 수가 없기에 여기에 쓴다. 조금은 너를 닮고 싶어서.

(2018년 4월 13일)

여름, 2018

2년 전 두 달 정도 만났던 M에 대해 쓴다면 이 문장으로 시작하리라고 늘 생각했다.

“너는 그렇게 남자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그 때 내 직업은 누드모델이었다. 파트타임이 아닌 전업으로, 햇수로는 5년이 넘어가는 프로 누드모델. 대학교와 문화센터, 동호회 화실과 작가의 작업실까지 봇짐을 지고 전국을 오가는 나날이었다. 레즈비언으로 완전히 정체화한 후 번개와 클럽, 원나잇 등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거침없이 누리던 때이기도 했다. 레즈이기에 망정이지, 이성애자가 이렇게 조심성 없이 굴었다면 진작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을 했을거라고 생각하며.

M은 어플에서 만난 원나잇 상대였는데, 일이 없을 때면 요일마다 달리 불러대는 상대가 서넛은 되는 걸 몰랐던 그녀는 내게 연애를 걸었다. 지속적이고 독점적인 신뢰관계에 기대가 없던 나와 달리 M은 착실하게 연애 테크트리를 타려고 했다. 내 주말이 모두 제것인 양 굴었고, 급기야 가장 친한 친구라며 어릴 때 함께 자란 사촌오빠를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사촌에게 커밍아웃을 넘어 여자친구(?) 소개라니, 이건 또 새로운 전개군.

영등포에서 만난 M의 사촌오빠는 깔끔하게 천박한 남자였다. 통신사 대리점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나온 지 오래된 기종인 내 핸드폰을 대뜸 집어들더니 바꿀 때가 됐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누드모델에 대한 무례한 질문들로 끝까지 날 불쾌하게 했던 자리가 끝나고, M은 나에 대한 그의 감상을 전했다. “걔 시계 비싼 거 찼더라?”

물려받은 낡은 오메가였다. 내 손목을 흘금거렸을 그의 말을 전하는 M을 보며, 사실 그건 M의 생각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내가 혐오한 것은 그의 성별이 아니라 그의(그리고 너의) 얄팍함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섹파 주제에 술을 마시면 영 팔힘을 못 써서 꼭 상위로 자위하듯 마무리하게 만들었던 술버릇을 싫어했고, 자라를 닮은 이목구비가 모아놓으면 묘하게 잘생겼던 얼굴과, 슬랙스가 잘 어울렸던, 굴곡없이 쭉 뻗은 다리를 좋아했다.

이 글을 읽는다면 네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다. 연락 그만 해.

(2020.10.)

합정동 풀잎미용실

합정동에서 40년 간 미용실을 해 오신 풀잎미용실 권인숙 할머니. 이 동네 n년 살았는데 처음 가봤다. 촬영을 앞두고 드라이를 해야 했는데, 평소에 다니던 상수동 미용실(드라이 3만원)로 걸어가다가 풀잎미용실 불이 켜져 있길래 충동적으로 들어가 봤다. 낡았지만 정갈한 내부, 볕 드는 곳에 빼곡한 작은 화분과 선인장들. 아마도 가게 안쪽으로 연결된 살림집에 사시는 듯, “계세요?” 청하자 부스스 나오신다. 원래는 전화로 예약을 받고 그 때만 가게를 여신다고. 투블럭 반삭(에서 기르는 중)인 내 머리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으신다. “아가씨는 미술 해요?” 하시고 마는.

원래 개성에서 태어나 전쟁통에 서울로 피난오셨고, 미용학교 졸업하고 안국동에서 10년, 합정동 이 가게에서 40년 미용을 하셨다고. 평생 한 일 하신 것으로 방송에 출연한 적도 있고, 어릴 때 이 동네 살며 항상 할머니에게 머리를 잘랐다 작가가 된 분이 낸 책에 인터뷰가 실리기도 하셨단다. 수줍어 하시면서도 이런 저런 자료들을 꺼내 보여주셨다.

안국동에서 미용실을 할 때는 지금 길상사 자리에 있는 요정에서 일하는 ‘기생들’ 머리를 만졌다고 했다.

“그때는 연애 실패하고 몸 버린 아가씨들이 기생이 됐어.” 하시길래,

“전 가끔 그런 언니들이 부러워요.” 했다.
“그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 해야지. 부모님은 어디 계신고? 아가씨는 올해 몇 살이야?”
“올해 스물 아홉이에요. 부모님은 필운동 사세요. 경복궁 옆에.”
“그렇게 안 들어 보이는데. 서울 사시는데 왜 따로 살아?”
“엄마아빠랑 못 살겠어요.”
“이 동네도 많이 올랐지?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 둬. 저기 사는 언니는 몇 년 전에 7천으로 샀는데 지금 2억이 됐어.”
“제가 돈이 어딨어요..”

이런 얘기들. 싫지 않았다. 한참 내 말상대 해 주시고 옆머리까지 미니고데기로 펴 주시곤, 만원만 받으신다. “파마하러 올게요-” 했더니 힘들어서 안 하신다고.. 십 년만 젊어도 가발이랑 두상을 연구하고 싶다고 하시길래, 지금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살림의료생협의 반세기커플 프로젝트에서 본, 여성영화제 상역작 영화 생각이 났다. 다음에 한 번 보여드릴까?
황사 맞으며 머리 팔랑이고 촬영 잘 다녀 왔다. 오늘까지도 기분이 좋아서, 기록.

(2015년 2월 27일)

“여자를 가장 잘 아는 두 여자”

어제 전경린 <천사는 여기 머문다> 북토크 다녀 왔다.

문학동네는 왜 전경린 작가를 자꾸 ‘연애소설 잘 쓰는 작가’로 네이밍 하는건지 심히 불만이고, 40명만 미리 뽑아서 하는 작가와의 대화에 참가하는 독자들은 왜 자기 연애상담 따위를 작가에게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변영주감독님이 ‘라디오 상담실 같아요’라고 한 코멘트, 현장에서는 재치있고 웃음 나오는 발언처럼 소화됐지만 나는 뼈가 있는 말이라고 느꼈고.

동거녀, 이혼녀, 불륜녀..이런 네이밍을 전경린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라벨링하는 것, 그것은 독해를 위한 한 스텝이어야 하지 최종적 평가여서는 안되는데.. 자기가 결혼은 하기 싫고 애는 낳고 싶은데 어쩌면 좋냐는 질문을 왜 작가님한테 하고 앉았냐…..

내게 전경린 소설은 여성의 ‘연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 자유’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소설집 중 ‘폭우에 떨어진 낙과같은 여자들’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일견 부정적 표현이지만 나는 그 낙과에 감정이입한다. 낙과처럼 땅에 떨어졌기에 자유로운 여자들, 가부장-자본주의에서 ‘팔리기 위해’ ‘상품’으로 자기를 자발적으로 위치시키는 탐스러운 과일이 되고자 하는 여자들이 아니라, 자신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이미 자신은 특정한 트랙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그런’ 여자들이 누리는, 역설적 자유.

말하자면 뻔한 얘기다. 착한 여자는 천당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는. 그렇지만 뻔한 구절이 내 삶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알라딘에서 하는 작가와의 대화 신청 페이지에서, 신청 이유를 나는 이렇게 적었다. “전경린 작가님과 변영주 감독님은 내게 용기를 주는 분들이다”고. 대화 중 변감독님이 “나는 한 가지를 선택할 때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은 사라진다”고 하신 것도 그렇고, 요즈음 내게 용기와 확신을 주는 구절들이다..

암튼 다음은 기억나는대로 끄적인 전경린 작가의 코멘트 들. 워딩은 정확하지 않고, 그냥 내가 재구성한 것이니 틀릴 수도 있음.

(전경린이 소설에서 연애를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지금 한국의 2-30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게 연애인 것 같이 얘기되지만, 사실 한국사회에서 자유연애라는게 사회적으로 용인된 것은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았지요. 아직도 어떤 나라에서는 가족이 허락하지 않는 연애를 했던 여성을 지구끝까지 쫓아가서 살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런 의미에서 연애는 개인의 역량이 모두 발휘되는 장인 동시에, 사회가 허용하는 관계의(?) 범위, 그 상상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드러내는 장이기도 합니다.”

(한 독자가 <백합의 벼랑길>마지막 부분을 낭독한 후)
“그 부분은 저도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슬픔이 내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쁨이야말로 개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 공유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맥도날드 멜랑콜리아>등에서 마산, 진해의 풍경이 세밀히 묘사되었다는 질문)
“변영주 감독님의 <화차>에도 마창진(?)이 풍경이 잘 드러나서 주민들이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고 들었어요. 요 즈음 저는 한 작가가 어떤 지역에서 거주하고 생활할 때, 작품에서 그것이 드러나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14년 8월 14일)

[인터뷰] 접속유지

패널소개

정규리: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소설가의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으나 여자만 줄창 만나다가 여성학과에 진학, 퀴어 이론을 공부하고 번역까지 하게 되었다.

‘성적/노동’에 대한 석사 논문을 쓰려고 누드모델회사에 잠입했다가 적성을 깨닫고 생업으로 삼은 지 1년 반이 되었다. 장래 희망은 레즈비언을 위한 성적 콘텐츠(포르노/에로잡지/야설)등을 생산하는 것. [가가 페미니즘]을 공역했다.

밥벌이 vs 작업의 갈등

정규리 (여성학): (밥벌이와 작업을 일치시킨 것 아니냐는 질문에) 네가 하고 싶은 게 포르노면, 지금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친구들이 묻기도 한다. 나는 미술학원, 문화센터, 대학에서 그림 모델을 한다. 실은 창작보다는 여성주의 포르노, 레즈비언 포르노를 통한 여성운동을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을 벌려면 좀 야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최근에 출연한 영화에서 내 역할은 창녀였다. 여자친구랑 헤어지기 위해서, 창녀 불러서 여자친구 옆에서 섹스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였다. 그걸 전혀 모르고 현장에 갔기 때문에 멘붕이 왔다.

내가 성 노동 운동을 하려는데 창녀 역할을? 그래서 현장 상황을 아카이빙하는 것도 운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애써 하면서,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http://slownews.kr/37208

정규리: 내가 에디터로 참여하고 있는 [젖은잡지]는 모델 정두리 씨가 사비로 제작하는 잡지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잘 팔린다. 이 잡지를 통해 나도 처음으로 독립출판을 경험했다.

그전에는 [가가 페미니즘]을 친구들과 함께 공역해 이매진 출판사를 통해 낸 적이 있는데, 화제가 되어서 초반에는 조금 팔렸다. 근데, 그것보다 [젖은잡지]가 짧은 기간 동안 더 많이 팔렸다.

사실 요즘은 메이저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책을 혼자 만들어볼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트위터를 통해 책을 팔려면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 사진도 계속 올리고, 사생활도 노출하면서. 이 씬에서 어떤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것 자체가 독립출판의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니까.

내가 궁극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레즈비언 포르노는 수익성은 없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친구들이나, 여성주의 영상 작업을 하는 친구들과 여성운동을 함께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나 혼자 레즈비언 포르노 만들어 돈을 벌 거야!’

이런 게 아니라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같이 운동을 해나가고 싶다. 이 좌담회에 온 것 자체도 그런 과정이다.

http://slownews.kr/37210

한겨레 문화센터 손바닥합평-배추벌레 살육기

노래방 일에서 가장 힘든 건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에 뿌옇게 퍼지는 담배연기였다. 허리를 안은 남자들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봉고차 옆자리 여자들과의 신경전도, 시급 6만원이라는 숫자 앞에서는 다 참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돈벌이와 마음을 분리하는 것은 월급쟁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코가 막히는 매캐한 담배 냄새만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일할 때만 입는 몇 벌의 옷에는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배어 갔고, 집에 돌아 온 새벽이면 행여 다른 옷에 냄새가 묻을까 황급히 옷을 벗어 문 밖 빨래줄에 널어 두곤 했다.

가난 때문은 아니었다. 명품을 사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배추벌레 때문이었다. 배추와 케일을 갉아먹는 벌레를 핀셋으로 잡다보면 출근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상추겉절이를 반찬으로 싼 도시락을 여유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마감에 가까울수록 잦아지는 야근과 그때마다 시켜먹는 순두부찌개가 지긋지긋했다. 학생 때 꿈꾸던 자전거 출퇴근과 주말 라이딩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을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척 하며, 모종삽으로 통통한 배추벌레를 반으로 잘라내곤 했다. 삽으로 그은 자리를 따라 초록빛 진액이 심술궂게 새겨졌다. 그런 내가, 낯설었다.

그해 봄, 건축회사를 그만 두고도 한동안은 실업급여로 버텼다. 그 흔한 동남아 한 번 가지 않고 20대의 6년을 바친 대가로 7천짜리 전세에 살고 있는 것도 조바심을 내지 않던 이유 중 하나였다. 작은 원룸이지만 옥탑을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이 방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맘에 든, 내 공간이었다. 한낮에 파라솔을 펴놓고 돗자리에 누워 있자면, 콘크리트의 냉기가 내 안의 분심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다. 스티로폼 텃밭이 늘어갔다. 장을 보지 않아도 밥상엔 쌈야채가 풍성했다. 그러다 통장 잔고가 99만원이 되던 날, 알바몬에 들어갔다. 다시 회사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한 달에 칠팔십만원 만 벌면 되겠다는 계산이었다.

가까운 역 몇 개를 클릭한 후 시급순으로 정렬하니 가장 위에는 편의점이 있었고, 맨 뒷페이지에는 토킹바가 있었다. 그 사이에는 택배상하차와 백화점 판매직, 그리고 텔레마케팅이 있었다. 주말 토킹바를 제외하면 매일 출근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월급이나 주급이 아니라 일급을 주는 일을 찾으니 나온 것이 노래방 도우미였다. 어차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였다. 전화번호를 감출수 있는 메신저 앱을 설치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도방 삼촌도 노래방 사장도 그저 무심했다. 대학생들은 워낙 금방 그만둬서, 라며 삼촌은 나이가 좀 있는 나를 오히려 반가워 했다. 노래방이 대개 지하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축농증으로 고생했던 초등학생 때 처럼, 집에 오면 소금물을 진하게 타 코를 헹궜다. 그래도 목이 잠기는 날이 많았다.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기서 거기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 재빨리 리모컨을 들어 음정을 한 키 낮추면 되었다.

일을 나가지 않는 날엔 자전거를 타고 잠실과 암사를 오갔다. 공기가 맑은 날은 충동적으로 팔당에 다녀 오기도 했다.

장마철이 되었다. 주인할머니가 배수구를 점검한다고 올라왔다가 빨래 줄에서 거두지 못한 홀복을 본 모양이었다. 왜 낮에 집에 있냐고 묻는 눈빛이 사마귀같았다. 지금은 같은 빌라에 살지 않지만, 딸네 집으로 합치기 전까지 이 동네에 오래 살아 귀가 많은 할머니다. 대학원에 입학했다고 둘러댔다. 한학기 만에 그만뒀지만, 취직하기 전에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 매일 도시락을 싸고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던 좋았던 시절, 그러나 학자금 빚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었던.

비가 지나가니 서른이었다. 배추벌레가 케일 위를 오간 흔적이 내 이력서처럼 어지러웠다.

런던 퀴어여성 전용 BDSM 파티 ‘스웻’에 가다

나는 BDSM(Bondage Discipline Sadism Masochism, 사람들의 성적 기호 중에서 지배와 속박, 가학과 피학 성향 등을 통칭) 성향자이며, 페미니스트다. 하지만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내가 가진 성적 기호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수 없으며 심지어 여성혐오자로 불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섹스 안팎에서 가학/피학 행위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남성’과 섹스도, 플레이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내가 실천하는 여성 간의 BDSM 섹스는 이성애 플레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가? 그렇다면 여성 간의 플레이는 반(反)페미니즘적이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나의 젠더 표현, 레즈비언 정체성, BDSM 성향 등의 ‘원인’이나 그 정치적 효과를 정의하거나 명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연달아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과 논쟁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저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 호주 브리즈번에서 활동하는 퀴어 포토그래퍼 Tristan Peter가 호주 잡지에 싣기 위해 작업했던 돔&섭 컨셉 화보의 일부. (©포토그래퍼: 트리스탄 피터, 모델: 칠월, 소이)

한국에서 레즈비언 BDSM 파트너를 찾는다는 건

내가 에세머(smer), 정확히는 섭 스팽키(성행위를 할 때 엉덩이나 허벅지 등을 맞는 것을 즐기는 사람)로 정체화한 시기는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다. 여성과 섹스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거친’ 섹스를 좋아하는 취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나아가 머리채를 잡히거나, 수갑 등으로 결박당하거나, 엉덩이를 맞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사실 이 정도 수위는 에세머들이 말하는 ‘바닐라’(BDSM 성향이 없는 일반인)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섹스 상대에게 위의 행위들을 요구하면 거부감을 가지곤 했기 때문에, 차라리 스스로를 에세머로 규정하고서 파트너를 찾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레즈비언이 (섹스를 동반한) 플레이 파트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엔 크게 두 개의 BDSM 성향자 웹사이트가 있는데, 내가 원하는 부치-스팽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끔 ‘구인’ 글을 올리면 쪽지함은 돔/섭 성향을 가리지 않고 남자들의 플러팅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여성 섭 혹은 돔과 내가 플레이하는 것을 ‘관전’하게 해달라는 제안이 여럿이었고, 그렇게 해준다면 금전적으로 보상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 번의 불쾌한 경험을 한 끝에, 나는 한국에서 레즈비언 BDSM 파트너를 찾는 일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퀴어여성 전용 BDSM 파티 ‘스웻’ 초청장 받기

지난 2016년 5월, 나는 서유럽 퀴어-BDSM-페미니스트 투어를 다녀왔다. 그런 여행상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직접 유럽의 퀴어 퍼레이드와 BDSM 워크샵, 퀴어 전용 술집과 서점들을 알아보고 날짜를 맞추어 일정을 계획했다. 브뤼셀 퀴어퍼레이드, 암스테르담의 BDSM 워크샵과 파티, 베를린,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의 레즈비언 펍과 페미니스트&퀴어 서점들을 방문했다. 

▶ 2016년 벨기에 퀴어퍼레이드 현장  ©칠월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벤트는 런던의 퀴어여성 전용 BDSM 파티 SWEAT(이하 ‘스웻’)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여성전용 ‘찜방’, 게다가 SM까지 할 수 있는 사우나라니, 딴 나라 얘기를 책으로만 읽다가 실제로 가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꿈만 같은 일이었다.

SWEAT(sweat-london.co.uk)에 대해 알게 된 건, 런던 페티쉬 씬(londonfetishscene.com)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여행 전에 BDSM/페티쉬 사이트인 펫라이프닷컴(fetlife.com)에서 도시별로 내가 머무는 날짜에 열리는 행사를 검색했는데, 런던에서 스웻을 한다는 걸 알고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 런던 페티쉬 씬 홈페이지 (출처: londonfetishscene.com)

스웻은 세 명의 퀴어여성 오거나이저가 운영하며 여성퀴어를 대상으로 열리는 비정기 행사다. 미리 등록된 메일링리스트에 초대장이 돌고, 우리로 치면 인터파크 같은 사이트에서 예매를 한 후 자세한 장소를 안내받는다. 나는 행사를 알게 된 후 메일을 보내서 리스트에 초대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가입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당신을 스웻 메일링리스트에 추가하고 다가오는 행사 알림 메일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검증 절차를 거칩니다. 이것은 우리와 당신을 보호하는 조치이므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절차는 가능한 빨리 처리됩니다.

-스웻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이전에 비슷한 행사(예를 들어 섹스와 BDSM을 위한 공간)에 참여한 경험이 있나요? 반드시 경험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음!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 스웻은 여성 혹은 트랜스* 스펙트럼으로 정체화하는 이들을 위한 섹스 및 BDSM 플레이 공간입니다. 당신이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세요.”

답장을 보냈고, 곧 초대장을 받았다. 주의 사항이 포함된, 엄청 길고 딱딱한 메일이었다. 대문자 MUST(~해야 한다)가 난무했는데, 의상이나 에티켓 등을 안내하는 이 메일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입장료는 15파운드에 예약 수수료 2파운드를 더해 약 3만원.

오리엔테이션과 대화, 합의의 과정을 거치고

행사는 저녁 8시부터였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7시 30분까지 와서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라고 했다. 나는 오전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목욕재개하고 란제리와 가죽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탔다. 엄청 외곽에 있는 개인집일줄 알았는데, 킹스크로스 역에서 지하철로 고작 10분. 장소는 놀랍게도 시내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아마도) 게이 찜방이었다. 입장하면서 라커 키와 타월을 받았다. 쿠키와 홍차가 무료로 제공된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술이나 마약에 취해있지 않으며 룰을 지키겠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장소를 안내받았다. 한쪽에는 사우나, 샤워실이 있었고, 가운데는 공개 플레이를 위한 넓은 침대 하나, 문을 잠글 수 있는 작은 방들이 여럿 있었다. 공중그네의자가 천정에 매달려 있는 방 등 방마다 테마가 다양했다. 프라이빗 섹스를 위해 준비된 이런 방들을 ‘다크 룸’이라고 부른다. 

▶ 암스테르담 BDSM 주간의 본디지 워크샵 모습  ©칠월

8시가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총 30명 정도였는데, 다양한 체형과 다양한 성별 표현,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라틴계나 아프리카계 등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백인이었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복장은 자유, 대부분 비키니나 란제리를 입었거나 팬티만 입은 상체 노출. 영화 <용 문신을 한 소녀>(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데이빗 핀처, 2011)의 리스베트 같은 옷을 입은 언니도 있었고, 모자부터 구두까지 완벽한 경찰 복장을 한 언니도 있었다. 피어싱과 타투를 한 언니들이 참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팸들은 수영복이나 란제리를 입고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는데, 부치들은 거의 복장을 갖춰 입은 데다 장비가방(?)을 철컹거리며 들고 다닌다는 것. 안에는 딜도나 각종 토이가 들어 있는 듯. 플레이를 하기 전에 커다란 가방을 뙇 내려놓고 채찍, 패들, 회초리, 까칠장갑 등 토이들을 하나하나 꺼내 소중하게 펼쳐놓는 것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10분 정도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다. 2분마다 상대를 바꿔 가며 대화를 하는 거였다. 아이스브레이킹 후에는 자유시간인데, 상상했던 것처럼 바로 난교가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야동을 너무 봤나 보다) 다들 사우나와 스파에 몰려가서 수다를 떨었다. 스파에 자리가 없었다. 대화를 하면서 취향이 맞는 상대를 찾으면 함께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역시 섹스와 BDSM 플레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향, 플레이 수위의 조율과 이에 대한 명시적 합의를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안심하고 할 수 있다는 것

몇 명과 대화를 나누다 사우나 밖에서 찰싹찰싹 소리가 들리길래 나가봤더니, 스팽킹 플레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스팽커의 손길은 능숙했다. 스팽키를 무릎 위로 엎드리게 하고, 손바닥으로 양쪽 엉덩이를 번갈아 때렸다. 손바닥이 엉덩이에 닿는 순간 절도 있게 멈추는 찰진 스냅이었다.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가 싶다가 어느 순간 약하게 때리기도 하고, 중간 중간 스팽키에게 괜찮냐고 계속해서 확인하곤 했다. 도구를 바꿔가며 엉덩이를 때리다가 둘이 무슨 대화를 하더니, 스팽키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서서 양 손으로 벽을 짚었다.

스팽커는 여러 갈래의 가죽 채찍을 꺼내 들었고, 이번엔 엉덩이가 아니라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스팽키의 온 몸이 꿈틀거렸다. 관전을 하다 보니 나도 흥분해서 스팽커에게 플레이를 요청했다. 약 5분 정도(짧은 것 같지만 굉장히 긴 시간이다) 플레이를 한 후 이만하면 됐다고 하고 마쳤다.

▶ 스웻 워크샵에서의 스팽킹 플레이의 흔적  ©칠월

아직 경험이 없는 본디지 플레이(밧줄이나 사슬로 몸을 묶는 것)도 해 보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스팽킹으로도 충분했다. 숙달된 마스터의 손길은 그 자체로 너무나 섹시했다. 플레이가 끝난 후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하며 포옹을 나눴다. 여성퀴어 전문가와, 정확히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안심하고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이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섹스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크 룸은 만실이었고, 중앙 침대가 비좁아졌다. 경찰 옷을 입은 언니는 벽에 서서 조교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더 보고 싶은 장면이 많았지만 지하철 시간 때문에 10시 반쯤 일어나야 했다.(행사는 자정까지 열렸다) 몇몇 사람과 펫라이프닷컴 친구를 맺고,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 돌아오며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엉덩이가 기분 좋게 아렸다. 여행 내내, 나는 붉은 멍이 차차 보라색으로, 노란색으로, 살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그 날을 추억했다. 

http://ildaro.com/8229

영화 단역 알바를 했다.

영화 단역 알바를 했다. 역할의 이름은 ‘창녀’. 전에도 에이전시를 통해 샤워씬 섭외가 들어왔는데 문신과 왁싱 때문에 짤렸던 영화다. 회사에선 옷을 벗는 뒷모습 정도만 나오고 얼굴이 안 나온다고 했다. 얼마 주는지는 묻지도 않고 한다고 했다.

11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혜화 낙산공원에 접한 낡은 빌라였다. 핸드폰 지도앱을 보며 빙빙 돌고 있을 때, 영화 스탭인것 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혹시 영화 촬영..’이라고 물었더니 맞다면서 데려다 줬다. 11시쯤 도착. 허름한 자취방. 여자 배우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배우분께 대본을 청해 내가 나오는 장면을 읽어봤다. 주인공 남자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일부러 성매매여성을 데려와 여자친구 옆에서 섹스를 하는 (풉) 씬이다.

전체 시나리오를 훑어보았다. 음, 성매매여성을 ‘창녀’라고 하는 워딩,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그 옆에서 ‘창녀’를 불러 섹스를 한다는 설정 등 여성에 대한 감독(이자 작가이자 주연배우)의 고정관념과 문제의식은.. 말을 아끼도록 하겠음. 여튼 내가 첫 ‘연기’를 성매매여성으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웃기고 재미가 있었다. 풉. BDSM주제의 논문, 젖은잡지, 슬럿워크, 누드모델에서 급기야는 성매매여성(역할)까지.. 어쩜 이렇게 일관성이 있냐.

원래 대사도 얼굴도 나오지 않고 그냥 옷 벗는 모습만 나온다고 듣고 가긴 했는데, 실제로 촬영을 한 것은 섹스씬이었다. 우리 회사 대표님도 대동했는데 (원래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는 일에는 남자인 대표님이 동반한다고 들었다. 여자 모델에게 처음 얘기한 것과는 다른 요구를 하는 경우도 많고 여러 위험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내가 처음 들었던 것과는 다르지 않냐고 물었더니 감독이 스탭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음, 나는 뭐 얼굴이 나오거나 섹스씬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연기 경험이 없어서 잘 못할까봐 그게 걱정인거라고 했다. 감독은, 보통 여자 모델들은 얼굴이 나오는 걸 꺼리는데, 얼굴 나오는 게 괜찮다고 하니 모델이 아니라 배우처럼 대사도 넣고 씬도 더 길게 가고 좀 더 역할을 주는 거라고 선심쓰듯 말했다. 뭐.. 좋다. 언젠가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왔다는 정도. 물론 그 역할이 ‘창녀’일 줄은 몰랐지ㅋㅋㅋㅋ 대표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말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여튼 감독은 연기력을 걱정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연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역할이 남자는 깡패고 여자는 창녀에요. 쉽거든”

그래서, 그렇게 진행을 했다. 모델료는 그대로 가고. (애초에 나는 이 일로 얼마를 받는지 모르고 갔다. 이건 내 실수.) 대신 나중에 영화 정보 페이지에 프로필도 올라간다고 했다. 내 대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옷을 급하게 벗기는 주인공에게 콧소리를 내며 “오빠 왜 이렇게 급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가 나를 문짝에 밀치고 겉옷과 팬티를 벗기면 나는 브라를 벗고, 섹스신, 과장된 신음소리, 즉 ‘창녀 연기’. 근데 자꾸 다시 찍는거야.. 결국 내가 연기지도(!)를 하고 말았다. “허리를 더 밀착하셔야 되요. 박는게 아니라 붙어서 비비는 느낌으로.” 뭐 실제 삽입은 안 했는데, 가짜로 하는 게 더 힘든 듯..

나중엔 나한테 사과하더라, 자기가 배우출신이긴 하지만 섹스 씬을 찍은건 처음이라 연기를 못 해서 죄송하다고. 나는 그럼 뭐 프로냐ㅋㅋㅋㅋㅋㅋㅋㅋ 감독이 자꾸 ‘제가 처음이라..’라고 하는데 레즈비언 커밍아웃 욕망 넣어두느라 혼났다. ‘저도 남자랑 이런 건 처음이에요.’

음, 지금 생각 해 보니 감독이 게이인가? 아냐 게이라면 그렇게 남성성/여성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나올 수가 없어.

여튼 풀샷 다섯번 쯤 찍고, 클로즈업을 세 번 정도. 결국 두 시에 끝났다. 대기시간 포함 세 시간을 잡혀 있었던 건데,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시간 당 페이를 받는 모델일로는 매우 적게 받고 한 셈이 되었다. 그래도 내 부분 촬영 마치고 전원에게 박수 받았다. 감독은 오늘 연기 좋았다며, 다음 작품에서 주연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뭐, 즐거웠다. 내 장래희망인 ‘레즈비언 포르노 배우’의 첫 발을 디딘 하루였음.

(2015년 초. 날짜 기억 안 남)

[인터뷰] 플레이보이, 누드와 직업

어떻게 누드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나?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여성 노동의 성매매적 요소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여기에 좀 더 정확한 이해와 인식을 위해 2013년 여름부터 시작했다.

실제로 겪은 누드모델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

생각보다 누드가 쓰이는 곳이 많다. 미술이나 사진 작업 외에 의료상의 촬영이나 단편영화의 단역, 오페라 공연에 섭외된 사람도 있다. 시작하기 전에는 성적인 요소가 있어 성희롱이나 추행에 노출된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럴 겨를조차 없는 육체노동이었다.

누드모델에 대한 관심은 언제 처음 생겼나?

대학교 2학년 때 사귀던 언니의 라이브 공연에서 미술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퍼포먼스를 했던 사람이 누드모델 일을 한다고 해서 관심이 생겼다. 전부터 누디스트 문화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관심을 갖고, 일을 하면서 ‘누드’라는 단어에 대해 나름의 정의가 내려졌나?

존 버거의 말을 빌리면,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정의를 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누드라는 단어는 분명히 사전에 정의되어 있지만, 대부분 사람이 ‘누드’ 하면 젊은 여성의 신체를 떠올린다. 야하다는 인식과 함께. 왜 사람들이 누드를 야하다고 인식하고, 젊은 여성의 신체를 먼저 떠올릴까? 아무래도 상업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이용하고, 반복적으로 주입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서양화에 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거나 음란물로 소개한 역사가 있지 않나. 재미있는 건 원래 누드모델은 남자의 영역이었다는 거다. 누드는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에서 생긴 장르인데, 그때만 해도 종교적이거나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그래서 주로 남자의 신체를 이용해 신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그런데 근대 이후 등장한 서양화에 여성이 등장하면서 지금의 인식을 만든 거다.

지금의 인식 속에서 누드모델 일을 하는 젊은 여성으로 사는 건 어떤 건가? 그리고 당신은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다. 언제나 선입견이나 불편한 시선과 마주해야 할 것 같은데.

좋다. 레즈비언이나 누드모델이어서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여전히 차별과 혐오가 넘치는 사회라는 것이 피곤하기도 하다.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나 싶다가도 일단 내 삶부터 잘 꾸리고, 주변부터 바꿔나가자는 생각에 참곤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혹은 서울에서 무엇보다 ‘누디’했으면 하는 게 있다면?

시선의 문제는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 낙차가 존재한다. 남성이 여성을 응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이 이런 낙차다. 예를 들어, 누드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에 대해 조금 더 고려되었으면 한다. 광고나 영화, 게임 등에서 벗는 여성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생각하면서, 어떤 알몸은 너무나 불편하게 여긴다. 퀴어 퍼레이드에서 성 소수자의 노출은 음란하다며 비난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열린 대중적 축제의 노출은 훨씬 심하다. 누드라는 단어는 이런 낙차를 은폐한다. 우리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직시했으면 한다. 나는 이런 낙차를 거스르는 작업을 하고 싶다. 나에게는 페미니즘, 레즈비어니즘이 그렇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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